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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 is present #시작된 여정-4

번호 1423
카벙클 | 비술사 | Lv.70
18-10-26 01:55 조회 10305

*

 

깜빡.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뭔가 즐거운 꿈을 꾼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에 가서, 즐겁게 모험하는, 그럼 꿈을.


그녀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뺨에 닿는 공기는 서늘한데 이불 속은 따끈따끈해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몸을 한 번 더 뒤척였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을 만큼 최고의 잠자리였다.

이불은 구름같이 푹신하고 가벼웠고, 아래의 매트는 적당한 탄력으로 그녀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짐 침대가 이렇게 좋았었나?’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져버리고 그녀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즐겼다.


이제 일어나야겠지...’


슬슬 출근할 시간이었다. 꼼지락거리며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펴면서 하품을 한 그녀는 주변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많이 이상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만져지는 이불의 감촉이 너무 고급졌고, 꾸욱꾸욱 누르며 확인했지만 자신이 지금도 누워있는 것은 침대가 분명했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서 자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집에는 침대가 없었으니까...!


뭐지...? ??”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꽤나 하이톤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몇 번을 아, , 거리면서 확인했지만 늘 듣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녀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불을 켜야, 으악!”


불을 켜보기 위해 혹시 있을지 모를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던 그녀는 갑자기 불이 켜지며 밝은 빛이 눈으로 들어오자 얼굴을 찡그리며 눈앞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의 비명소리가 울리자 확 밝아졌던 광원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슬며시 밝기를 늘려가며 적당히 은은한 빛을 내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오르골로 연주하는 잔잔한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그녀는 더 무서워졌다.


, 귀신인가?’


숨소리조차 죽인 그녀는 밝아진 방안을 슬쩍 둘어보았다.

서양식 가구, 소파, 고급진 장식품에 반짝이는 크리스탈로 된 샹들리에... 100%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윽고 잔잔히 주변에 깔리는 오르골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침대 바로 오른편에 있는 3단 서랍. 그 서랍 바로 위에 놓여있는 금빛의 각종 보석이 박힌 라디오...와 비슷한 스피커가 달린 물건, 오케스트리온이었다.


그녀가 오케스트리온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것은 눈이라도 달린 듯 뚝 하고 음악을 그쳤다.

갑자기 멈춘 음악에 흠칫하던 그녀는 계속해서 이상한 라디오(그녀의 입장에서는)를 노려보더니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혹시 물기라도 할 것 같은 동물을 만져보듯 살짝 살짝 건드려보던 그녀는 오케스트리온을 들어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눈앞에서 오케스트리온을 휙 뒤집었고, 무언가 툭 하고 그녀의 무릎위로 떨어졌다.

꿈틀. 그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이불 너머에서도 느껴졌다. 무릎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쫘아악 소름이 퍼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무릎팍을 내려다보았고, 낑낑대며 고개를 든 인형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와아아아악!!!”

! 나나모니랏!!!”


있는 힘껏 들고 있던 오케스트리온을 무기삼아 내려치려는 두 손을 멈춘 것은 나나모라는 귀에 걸리는 단어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기보다 훨씬 큰 게다가 울퉁불퉁 각진 곳이 있어 작은 인형의 입장에서 보면 더 흉악한 오케스트리온에 얻어맞을 것 같자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말고 벌벌 떨고 있는 인형의 모습을 보자 조금씩 두려움이 가시며 흥분되었던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오케스트리온을 내려놓고 인형에 손을 뻗어 살며시 들어올렸다.


... 미안해. 무서웠지?”


인형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자세히 보니 굉장히 귀여운 인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자 인형은 간지러운 듯 웃으며 손바닥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도도도 침대 가장자리까지 뛰어가더니 이렇게 외쳤다.


짐이 허락하노라!”


...... 경위를 알 수 없는 생뚱맞은 말이었지만 마냥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형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불쑥불쑥 나타나는 작은 머리들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수가 어떻게 숨어있을 수 있었는지!

침대 밑에서, 천개 위에서(이 고급진 침대는 위를 덮어주는 천개도 있었다.) 침대 기둥 뒤에서, 소파 밑에서 작은 친구들이 쪼르르 다가왔다. 아니, 우르르르 몰려왔다.


몰려오는 작은 친구들 중에는 사람을 본뜬 인형이 아닌 것이 훨씬 많았다.

검은 강아지와 점박이 노란 고양이. 하늘색 영양에 올빼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젤리에 괴물을 따라 만든 듯한 인형. 프라모델 모형과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녀는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공통점이라면 주먹만 한 크기에 살아 움직인다는 것뿐인 기묘한 작은 친구들이 자신을 향해 슬금슬금 모여들자 걱정도 함께 슬금슬금 몰려왔다.

그렇지만 쪼르르 무릎팍에 올라와 칭찬해 달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님 인형을 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펴서 인형을 어루만졌다.

너무 좋아하는 인형의 모습에 잠시나마 무서워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운 정도였다.


나나모니랏!”

, 그게 네 이름이구나. 그럼 나나모 인형인건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나모 인형이 그녀를 가리키자 그녀는 곧 자신의 이름을 말해달라는 것인 줄 알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내 이름은- ”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말이 멈췄다.


“......뭐지?”


이상했다. 잠에서 깬 이후로 계속 이상한 일만 일어났지만, 이것이 가장 이상했다. 지금까지 이 위화감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고, 한편으로는 납득이 갔다.


머릿속이, 기억이, 이상했다.


, 하하... 이게 뭐야....?”


기억이 텅 비어있었다.

순간 강한 현기증이 느껴져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 대신에 필사적으로 다른 것들을,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을 떠올려보려 했다.


, 나는 분명... 엄마도, 아빠도...”


그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동생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구들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분명, 분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 우윽....”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짜증이 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했다. 화가 났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건지 소리 지르며 묻고 싶었다.


흐윽... 으아아아아...”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이 몰아쳐서 그녀는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제 더 이상 생각해 낼 수 없다는 슬픔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애통이 되어 모든 감정을 쓸어버리고 가득가득 가슴을 메웠다.


끅끅거리며 이불과 가슴팍을 부여잡고 흐느끼던 그녀는 머리나 등, 그리고 무릎과 옆구리에 닿아오는 감촉을 느꼈다.

눈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각종 울음소리와 피부에 닿는 감촉으로 그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애초에 이 방에는 그녀 외에는 그들밖에 없었으니까.

전신을 감싸도록 다가붙는 그 감촉이 누군가가 안아주는 것 같아서, 그녀는 결국 목 놓아 크게 울며 발버둥 쳤다.


- 새로운 세계에서의 첫 밤은 매우 슬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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