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을 기다리며, 등장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흉터를 아는 자」
어느 맑은 날의 도마 도읍지. 율재학당에서 돌아오는 길일까. 아이들이 공터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풍경. 그러나 거기서 심상치 않은 말이 들렸기에, 유우기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건 제국 장군의 칼에 베인 흉터야!” “아니거든! 식인 호랑이를 물리칠 때 발톱에 긁혀서 생긴 흉터라고!” 아무래도 히엔의 이마에 난, 십자 모양 흉터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근거 없는 소문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제천대성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그런 거라니까!” 대룡 산맥 깊은 곳에 산다는 서수와 힘겨루기라니, 생각지도 못한 의견까지 등장했다. 그야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정답은 아니다. 그 흉터는―― 유우기리는 머나먼 과거의 추억에 잠겼다. 유우기리가 아직 스이 마을에 사는 꼬마였을 적의 이야기다. 규율에 따라 바깥세상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유우기리를 비롯해 호기심 왕성한 스이 마을의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지상으로 놀러 나가고는 했다. 어느 날, 다 같이 도마 성을 구경하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도마 성으로 떠난 아이들의 눈에 비친 것은 글로만 접했던 활기 넘치는 마을이 아니었다. 전투로 인해 반쯤 붕괴한 거리에서 어깨를 으쓱대며 걷는 시커먼 제국 병사들의 모습뿐. 게다가 그 침략자들이 주민을 폭행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자, 아이들은 겁을 먹고 마을로 도망쳐 버린다. 그때, 유우기리는 친구들과 떨어져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떨결에 들어간 얀샤의 울창한 대숲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 소년은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목검을 들고 오로지 검술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폭포수 같은 땀을 흘리며 훈련을 계속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낯선 땅에서 길을 잃었다는 불안은 신기하게도 눈 녹듯 사라지고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뭐 해?” 느닷없는 물음에도 소년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검술 수련. 힘이 없으면 싸울 수도, 지킬 수도 없으니까!” “어린애가 누구랑 싸워? 뭘 지키려고?” 그제야 소년은 목검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니군. 난 리진 가문의 슌, 도마의 무사다. 무사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 그래서 이렇게 힘을 키우고 있다.” 자신을 슌이라고 소개한 이 소년이 바로, 훗날 유우기리가 모시게 되는 히엔이다. 그는 유우기리가 스이 부족인 것을 알자 친절하게도 홍옥해 해변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무사히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날의 일은 줄곧 머릿속 한구석에 남았다. 그 제국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싸울 줄도 모르는 스이 부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짓밟혀버릴 것이다. 나도 힘을 길러서 고향을 지켜야 해―― 그렇게 다짐한 유우기리는 슌의 수련장을 다니며 슌을 따라 나무 막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수련’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흘러,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내 휴식을 핑계 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다운 놀이를 하는 일도 늘어났다. 유우기리가 마을에서 유행하던 ‘사방치기’를 가르쳐 주자 슌은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스이 마을에서는 매일 이렇게 논다고 하니 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슌의 반응에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도마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놀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슌에게는 이 대숲만이 감시자의 눈에 띄지 않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장소인 듯했다. 어느 날, 대숲에 가 보니 웬일인지 슌이 목검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유우기리가 무슨 일인지 묻자, 그는 백성들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제국의 침공에 반파되었던 도마 성을 식민지 총독부로 이용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복구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많은 백성이 강제 노동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이어지는 중노동에 몸이 망가져 쓰러지는 이가 끊이지 않았지만, 제국군은 무자비하게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혹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슌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도마의 전 군주이며, 현재는 식민지 부총독 자리에 있는 카이엔에게 강제 노동을 중단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제국 지배하에서 아무 권한도 없는 꼭두각시 부총독인 아버지는 손쓸 도리가 없었고, 그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슌은 제국군과 싸워서 백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으나, 카이엔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눈앞의 사건만 보지 말고 큰 그림을 보아라.” 그는 아버지의 괴로운 입장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따지지 않았지만, 유우기리의 앞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더는 고통받는 백성을 보고 싶지 않아! 도마의 무사로서 당장 모두를 구하고 싶다고!” 슌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황급히 몸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힘없는 아이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자신의 무능력이 답답하다고 했다. 유우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흐르고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던 슌이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수련은 하지 않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유우기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슌이 그렇게 불평만 하다가 포기할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으리라는 직감에 몰래 슌의 뒤를 밟았다. 아니나 다를까, 슌은 저택이 있는 도읍지로 돌아가지 않고 무슨 이유에선지, 폐허로 변한 무이강 유역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엔 종묘. 도마의 시조이자 슌의 조상이기도 한 인물을 모신 사당이다. 종교 행사를 혐오하는 제국의 정책 때문에 폐쇄된 사당 입구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슌은 그들의 눈을 피해 그늘에 숨겨져 있는 비밀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족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밀 출입문인 듯했다. 유우기리는 의아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계속 슌을 뒤를 쫓아갔다. 어두컴컴하고 곰팡내 나는 사당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안쪽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들렸다. 철컥…… 철컥…… 슌은 재빨리 기둥 뒤로 숨었고, 유우기리도 옆에 있던 징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강철의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주를 심핵으로 쓰고 있는 무장 꼭두각시 인형, 키요후사다. 발칙한 침입자들로부터 사당의 보물을 지키기 위한 존재가 지금도 그 임무를 수행 중인 모양이다. 슌은 숨을 죽이며, 유우기리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거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키요후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슌은 기둥 뒤에서 나와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유우기리도 슌을 놓치지 않으려 허둥지둥 달려 나오다 그만 징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통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러면 순찰하던 키요후사가 돌아올 것이 뻔했다. 침입자를 발견하고 대검을 들어올리는 키요후사를 보자, 유우기리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이제 죽겠구나……! 죽음을 각오한 유우기리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귀를 찢을 듯한 금속음만 들릴 뿐, 두려워하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뭇머뭇 눈을 뜨자 내려친 대검을 칼로 막고 있는 소년의 등이 보였다. 받아낸 칼을 힘껏 밀어내며 슌이 외쳤다. “유우기리, 피해!” 유우기리는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겨우 거구에게서 멀어졌다. 완력으로는 키요후사를 이길 수 없어 간신히 옆으로 몸을 움직여 대검을 피해 보지만 이내 다시 날아오는 칼날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 뒤쪽으로 튕겨 나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슌의 얼굴에 선혈이 흘렀다. 이마에 상처가 난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보고 말았다. 조금 전 키요후사가 대검을 휘두른 직후, 그 무게를 못 버티고 휘청거렸던 것을.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면 순간적으로 상대의 빈틈을 찌를 수 있겠어――! 지체 없이 그는 바로 도박에 나섰다. 대담하게 키요후사의 앞으로 달려들어 공격을 유도한다. “지금이야!” 공격이 오리라는 것만 알면 피할 수 있다. 슌은 키요후사의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번에도 칼날이 이마를 스쳤지만, 대검이 하늘을 가른 순간, 그는 완전히 상대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적의 몸이 비틀대는 사이에 슌은 침착하게 칼을 들어 수련했던 대로 찔러 넣었다. 심핵이 꿰뚫린 키요후사는 균형을 잃고 굉음을 울리며 쓰러졌다. 고개를 든 슌의 이마에는 새빨간 십자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우기리, 도망치자!” 승리의 여운에 젖을 틈도 없이 슌은 유우기리의 손을 잡아끌고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순찰을 담당하는 키요후사는 하나가 아니다. 슌과 유우기리는 사당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주저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살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잠시, 검은 그림자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강엔 종묘를 경비하던 제국 병사였다. “너희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사당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위반자는 처형하라는 총독님의 명령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겁에 질려 굳어 버린 유우기리를 감싸면서 슌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전부 내 책임이다! 처형하려거든 나만 하고 이 아이는 그냥 보내 줘!” 슌은 무릎까지 꿇으며 간청했다. “꼬맹이치고는 배짱이 두둑하군……” 검을 뽑고 자세를 잡는 제국 병사를 보며, 유우기리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소중한 친구가 처형당하고 만다. 어떻게든 해야할 텐데, 안타까운 마음만이 맴돌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멈추시오, 그 소년이 부총독님의 장남이라는 것은 알고 처형하려는 것이오?” 당시, 리진 가문을 모시던 거구의 무사, 고우세츠가 그곳에 나타났다. 슌의 정체를 알고 제국 병사는 놀랐지만 그래도 죄는 물을 수 있다며 반론했다. “그렇다면 경비 임무를 맡고서도, 아이들의 침입을 막지 못한 그대들의 죄도 물어야 할 터.” 고우세츠의 이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제국 병사는 이번만 봐주겠다며 내뱉듯이 말하고는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도마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제천대성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강엔 종묘에 침입한 이유를 묻는 고우세츠에게 슌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거구의 사무라이는 팔짱을 끼고 진심을 담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제천대성은 명성이 자자한 전설의 서수지요. 그 힘이 있다면 성 공사에 동원된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어쩔 작정입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슌을 보며 고우세츠는 말을 이었다. “강제 노동을 피해 도망친 자에게는 더욱 가혹한 탄압이 기다릴 터. 슌 도련님이 구하려는 자들이 그럴 각오가 되어 있을까요? 일을 벌이려면 반드시 그 앞일까지 헤아려야 하는 법입니다. 카이엔님께서 ‘큰 그림을 보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인 슌을 보자, 유우기리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슌은 목숨을 걸고 날 지켜 줬어! 그러니까 그만 용서해 줘!” 자초지종을 털어놓는 소녀의 말에 고우세츠는 귀를 기울여 주었다. “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벗을 구하려 한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 기개를 봐서 이번 일은 이 정도에서 덮어 두겠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마 성의 공사가 끝나고 백성들은 강제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대숲에서 단둘이서 했던 수련은 더 이뤄지지 않았다. 슌이 고우세츠에게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말씀이 옳아. 제국과 전쟁을 시작하기는 아직 이르다. 도마의 백성도…… 그리고 나도.” 소년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더니 이내 표정을 다잡고 선언했다. “하지만 난 언젠가 도마를 스이 마을처럼, 아이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 반드시 이뤄내고 말겠어!” “나도! 나도 그걸 돕고 싶어!” 유우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기다리마!” 그렇게 어린 소년과 소녀는 헤어졌다.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유우기리는 ‘숨겨진 마을’에서 기술을 수련한 닌자가, 히엔은 성인식을 치르고 어엿한 무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말다툼이 시시해졌는지 사방치기를 하며 놀고 있다. 이곳은 이제 아이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사방치기인가? 나도 끼워다오!” 십자 모양 흉터를 가진 사무라이가 나타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유우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소년은 자신의 맹세를 훌륭히 지켜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