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아포리아에서 시작하다」

눈이 흩날리는 성도 이슈가르드에서 편지를 받았다. 조합의 동업자를 통해 전달된 그 편지는 요컨대 의뢰서였다.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줄 테니 괜찮다면 협력을 부탁한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고, 끝에는 쿠루루 발데시온의 사인이 있었다. “흠, 무슨 일이지?” 얼마 전 라비린토스에서 만난 기묘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에렌빌은 중얼거렸다. 받아들일까 말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오는데 업무용 링크펄이 울렸다. 받았더니 몹시 흥분한 듯한 조합 사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이동이래! 이 별에서!” 사무원은 방금 철학자의회에서 발표했다는 내용을 마구 떠들어댔다. 종말, 별의 의지의 예언, 달 이주 계획……믿을 수 없다는 마음이 드는 한편 최근에 느껴지던 의문점에 대한 답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너도 하던 일 마무리되면 바로 본국으로 돌아와”라는 말을 남기고 통신은 급하게 끊어졌다. 그로부터 3일 뒤. 에렌빌은 이미 포획해 놓았던 동물들을 각자의 서식지로 돌려보냈다. 자기 몸 하나는 전송 마법을 쓰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사이에도 근동 방면에 나가 있던 동업자에게 심상치 않은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비명 섞인 보고가 들어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드 샬레이안에 내렸을 때는 더 이상 망설일 여지도 없었다. 그 길로 즉시 발데시온 분관으로 향해 문 앞에서 접수원과 대화 중이던 쿠루루를 발견하자마자 품속에서 그 편지를 꺼내 들고 말했다. “먼저 무슨 일인지부터 말해줘……!” 쿠루루는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란 듯했지만, 바로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쿠루루에게 들은 이야기는 철학자 의회의 발표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웠다. 새벽의 혈맹이 도달한 진정한 역사. 옛 시대에 일어난 종말이 다시 찾아왔으며, 달로 이주하는 방법만으로는 미처 구할 수 없는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 에렌빌은 평소에도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로 임했다. 조달꾼으로 일하는 이상, 전문 분야는 물론이고 세계의 문화나 정세, 여행에 필요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사실, 에오르제아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로 이끈 조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곳에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통통쥐를 포획하다 만나고, 두꺼비 모습으로 재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그가 갖고 있던 정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들은 상상조차 못 할 세계의 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 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수없이 많다. 내가 경험해온 범위에서조차 그럴 진데, 쿠루루가 밝힌 이야기까지 생각하면 도대체 이 별에는 얼마나 많은 발견이 묻혀 있는 것일까? 그것을 찾지도 못하고 별을 떠나는 것은―――단순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질문이 튀어나왔다. 쿠루루는 고맙다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조달꾼의 기동력과 연락망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계약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방주에 실을 에테르 축퇴로의 개량, 그에 필요한 인력 모집을 조달꾼 조합이 일부 맡았다. 일꾼들은 지식신의 항구에 모여 속둘레로 자재를 운반하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별바다에서 돌아온 새벽의 혈맹의 요청과 철학자 의회의 승인을 받아, 지금은 울티마 툴레로 향하게 될 배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 최종 완성을 위해서는 달의 도약 운항 장치를 수송해 오면서 그와 동시에 방주에 실려 있던 각종 견본을 배 밖으로 운반해야 한다. 라비린토스의 직원과 일사바드 파견단의 지원 인력 그리고 에렌빌을 포함한 조달꾼들은 타우마제인에서 보관원의 빈 창고까지 정신없이 짐을 날랐다. 또다시 승강기 하나에 나무상자를 가득 싣는다. 익숙한 일이긴 했지만 이미 온몸이 쑤신다. 다음 작업을 하기 전에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어떤 자가 말을 걸어온다. 이슈가르드 기병의 갑옷, 목 언저리에 보이는 황색 옷깃은 포르탕 가를 나타내는 것이었던가. 해적 청년과 매번 불꽃 튀게 싸우는 인물이라는 것을,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다. “이봐, 쿠쿠로 공방이 어딘지 알아? 이 짐을 거기로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거기는…… 아니, 내가 운반하는 게 빠르겠군, 그냥 이리 줘.” “앗, 진짜? 고마워ー!” 포르탕 가 청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들고 있던 짐을 에렌빌에게 건넸다. 그 역시 피로가 쌓였는지 손이 비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린다. “대신 이쪽을 부탁해”, 에렌빌이 자리를 뜨면서 말하자, 그는 원망 가득한 얼굴로――하지만 거절하지는 않고――산더미처럼 짐이 쌓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창천 거리의 용들에게도 와 달라고 부탁할걸……” 무심코 귀가 솔깃해졌다. 드래곤족은 일반적으로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어렵다. 용시전쟁 종결 이후, 인간과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잡일을 편하게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인가? 자세히 들어 두면 앞으로 드래곤족에 관한 의뢰가 들어올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잠시 말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돌아보지 않고 쿠쿠로 공방에 가기로 했다.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다음 일은 없다. 그리고 저렇게 거침없이 불쑥 다가올 듯한 사람과는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말자는 것이 신조였다. 조금 뒤 도착한 공방에서는 방주의 핵심이 될 에테르 축퇴로의 개량이 진행되고 있었다. 둥글게 늘어선 건물에는 기술자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안에서는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쿠쿠로 단쿠로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에렌빌이 가까이 있는 기술자에게 짐을 보여주자 그는 군소리 없이 바로 짐을 받았다. 짐을 갖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눈으로 좇고 있자니…… 엇갈리듯이 건물 안에서 선명한 노란색 생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세계 각지에서 협력자를 데려왔던 에렌빌은 짐작이 갔다. 저 생물도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일원이다. 직업상 매우 궁금하긴 했지만, 그동안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던 그‘무언가’……이번에는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본다. 노란색 생물 옆에는 갈론드 사의 제복을 입은 라라펠족 기술자가 함께 서 있다. 이름이 웨지였던가. 일단 그쪽을 보고 “고생이 많네”라고 말을 걸어본다. 그도 에렌빌을 기억하고 있는지 “안녕하심까”라는 싹싹한 대답이 돌아온다. “쉬는 시간이야?” “유감스럽게도 심부름 가는 길임다……. 알파랑 이 녀석도 함께 말임다!” 노란색 생물의 이름이 알파인가 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누군가 했더니 알파 뒤에 딱정벌레를 연상시키는 모형이 있었다. 앞에 있는 것을 쫓아 달리는 장난감 같은 것인가? 짐을 실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이 일행의 정체가 더욱 알 수 없어졌다. “그런데 알파는 대체 뭐야?” “뭐냐니, 우리 회사 사원임다만?” “아니, 그게 아니라……생물학적인 분류로 봤을 때.” “그야 초코보임다!” 초코보. 물론 모를 리 없다. 에오르제아의 대표적인 탑승용 짐승이며 삼대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아종이 존재한다는 것, 그 모든 종의 특징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아종은 도감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말문이 막힌 에렌빌을 올려다보며 알파가 ‘꾸엑!’하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그래……초코보 같기도……하고……?” 자신만만하게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맞다고 하는 웨지. 갑자기 옆에 있던 모형이 그의 다리를 쿡 찌른다. 아파 보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란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대장님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야 함다! 그럼 가보겠슴다!”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뛰어가 버렸다. 알파가 한번 울더니 그를 쫓아가고 모형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뒤를 따른다. 이상한 일행은 점점 더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에렌빌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란색이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멈췄던 사고가 겨우 되돌아왔다. 하필이면 ‘초코보인지 아닌지’도 몰랐다니. 물론 알파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종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그런 생물을 포획한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다. 신종 생물은 모두 철저한 조사 끝에 분류되고 이름이 붙는다. 알파도 연구자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 적절한 정의로 분류될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최근 세찬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만남 덕에 제법 날카로워진 사고가 생각을 재촉한다. 샬레이안이 정한 것이 반드시 진실이라는 법은 없다――새벽의 혈맹이 밝힌 것처럼. 현실은 항상 변한다――더 이상 용이 인간의 적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이 머리는 무엇을 ‘미지’로 분류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알려진 지식’으로 정의할 것인가. 생각해라. 계속 생각해. 그래야 진정한 발견을 할 수 있을 거야, 내면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멈춰 서 있는 에렌빌의 옆을 기술자와 직원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서서히 시선을 옮기니 그들에게 개개인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갑자기 수수께끼처럼 들리고 풍경을 만드는 사사로운 것이 눈에 띄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말 난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에렌빌은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역시 새벽의 혈맹이 이겨야만 해. 숨을 내쉬며 힘껏 기지개를 켜고 다시 앞을 바라본다. ――자,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야!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압축시켜 놓은 듯한 폭풍우 같은 시간이 흘렀다. 짐을 운반하는 사람들 사이를 레포릿이 구르듯이 뛰어다닌다. 몸집은 작아도 언변은 뛰어난 그들이 계속해서 쏟아 내는 달의 지식을, 샬레이안 연구자들이 모두 받아들여 계획에 반영시켜 나갔다. 의원들조차 종종걸음으로 곳곳의 진척 상황을 신속하게 확인한다. 에렌빌이 또다시 공방에 들렀을 때, 쿠쿠로 단쿠로는 아직도 쉰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타우마제인에서는 밤낮없이 갈론드 사의 사람들이 오가고,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라자한의 연금술사가 기술자와 머리를 맞대고 작업을 하고 있다. 실험 농장과 목장이 제공하는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는 일은 직원들의 가족, 하인 그리고 믿음직한 라스트 스탠드 직원들의 몫이었다. 끊임없이 커피와 차이, 영양제 등이 들어왔다. 마룻바닥에 누워 잠든 자에게 살포시 담요를 덮어주는 자도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비가 그치듯이 손이 비는 자가 점점 늘어났다. 에렌빌이 리틀 샬레이안에 마지막 짐을 내려놓았을 무렵에는 과반수가 자신의 작업을 끝낸 듯했다. 할 일이 없어진 사람은 라비린토스에 머물며 지시가 있으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머리 위 인공 하늘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소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들 들리는가, 철학자 의회의 푸르슈노 르베유르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푸르슈노는 사람들의 분투에 다시금 감사함을 전하며 몇 가지 확인 작업을 아직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하지만”, 그가 덧붙이자 청중의 기대가 단숨에 부풀어 올랐다. “방주는 완성되었다. 우리가 내민 손은 세상 끝의 별을 붙잡을 것이다.” 각자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짧은 순간. 곧 그것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리틀 샬레이안은 물론 라비린토스 전체가 끓어올랐다. 웃는 자, 우는 자, 서로 껴안는 자부터 옆 사람의 등을 두드리는 자까지, 각양각색의 환희가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었다. 에렌빌은 혼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지만, 속을 꽉 채우고 있는 뜨거운 열기는 분명 주변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한마디, 전해지기를. 하늘 끝까지. 아직 보지 못한 이 별의 내일까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일까. 종말이 지나가고 평온을 되찾아 가는 지식의 도시에서 에렌빌은 또다시 발데시온 분관을 향해 걷고 있다. 이번에는 의뢰서 대신 제안을 하나 가지고 왔다. 발데시온 위원회에 계속 협력할 테니 대이동의 뒷정리를 도와 달라고 하는, 구색만 맞춘 조건이다. 그들과 얽히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이미 대단한 일을 해낸 경험이 있어서인지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앞선다. 어쩌면 이 길에서 잠시 보류해 놓은 과제와 마주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조달꾼이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이기도 한, 에렌빌이라는 ‘마을 이름’을 선택하기도 전에 그의 머나먼 고향에서 직면하고 있던 그 난제와―― 분관의 문을 여니 쿠루루가 또다시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