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스토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성도 '이슈가르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놓인 비석 옆에 어느샌가 방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바탕에 붉은 외뿔 짐승…… 포르탕 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그 방패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틀림없이 그가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증거였다. 둘도 없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프란셀은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자넨 항상 그랬지……' 꽉 쥔 주먹이 무덤에 바치려 가져온 꽃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 아니, 16년 전의 일이다. 당시 여섯 살이던 프란셀을 사람들에게 인사시키려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포르탕 백작이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하지만 귀족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저 배운 대로 인사말만 건네는 지루한 만찬회는 어린 프란셀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한 바퀴 인사를 돌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듯했다. 결국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저택 밖으로 나가 잠시 바람을 쐬기로 했다. 이미 취기가 오른 아버지가 흔쾌히 그러라고 하자, 프란셀은 기뻐하며 탁자 위에 놓인 푸딩 한 접시를 챙겨 저택을 빠져나갔다. '흡! 얏! 하앗!' 포르탕 저택 옆 작은 정자에서 맛있는 간식을 먹으려던 프란셀은 그곳에 먼저 자리 잡은 이상한 사람과 마주쳤다. 웃통을 벗은 채 목검을 휘두르는 남자아이였다. '너, 여기서 뭐해?' 프란셀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한편 질문을 받은 남자아이는 갑작스레 사람이 찾아오자 흠칫 놀란 듯하면서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뭘 하긴…… 검술 연습이지. 보면 몰라?'
프란셀은 아직 어렸지만 '만찬회는 다들 정신 없이 노는 곳'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하고 떠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자신 말고도 연회장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그치만, 오늘 만찬회가 있잖아?' '그런 건 나랑 상관없어. 어차피, 의붓어머니…… 포르탕 백작부인은 내가 만찬회에 안 나오길 바라거든. 아버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난 연습하는 게 더 좋아…… 좋은 기사가 되려면 뛰어난 검 솜씨가 필요하니까' 은빛 머리 소년 오르슈팡이 포르탕 백작의 사생아이며 백작부인이 못마땅히 여기는 존재란 것을 이해하기엔 프란셀은 아직 너무 어렸다. 그래서 프란셀은 목검을 손에 든 형 뻘로 보이는 이 남자아이를 그저 자신처럼 순수하게 '만찬회를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해 친근감을 느꼈다. '그럼, 나랑 같이 푸딩 먹을래? 아주 맛있어!' 어린 오르슈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실룩거렸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참으로 달랐다. 공통점이라곤 둘 다 명문 귀족 집안 도련님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나마도 정식 혈통의 넷째 아들과 사생아였기에 같은 처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프란셀은 책벌레인 데다 얌전하고 오르슈팡은 검을 좋아하고 씩씩하니 성격 또한 정반대였다.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체격 역시 크게 달랐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았다. 프란셀은 오르슈팡의 강인함을 동경했고, 오르슈팡은 프란셀의 다정함에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다. 의붓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숨 막히게 살아온 사생아에게 이웃 집안의 넷째 도련님은 마음 터놓을 몇 안 되는 친구였으리라. 그런 두 사람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처음 만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프란셀은 아버지를 따라 귀족사회의 정기행사에 와 있었다. 커르다스 동부저지 검은미늘 호반에서 열리는 '사냥'에 참석한 것이다. 초코보를 타고 사냥감을 쫓는 것은 귀족들에게 있어 중요한 행사였다. 이것은 놀이인 동시에 귀족 간 교류의 장이며, 초코보 타는 기술을 익히고 협동심을 키우기 위한 군사훈련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막 열한 살이 된 아들을 사냥에 데려온 것은 귀족 집안 아버지로서 아주 당연한 행동이었다. '매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잘 보거라. 그 밑에 기병들이 몰고 온 사냥감이 있을 게다' 공적을 세우게 하여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것인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몇 번이고 조언을 해 주었다. 프란셀은 그런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고삐를 살짝 쥐고 발로 신호를 보내 초코보를 달려 앞서 봐둔 호숫가의 수풀로 향했다. 무술 솜씨는 아직 부족했지만, 오르슈팡에게 철저히 배운 덕에 초코보 타는 솜씨 하나는 뛰어났다. 안장 위가 가벼워서인지 프란셀이 탄 초코보는 가뿐히 땅을 박차며 눈 깜짝할 사이에 아버지의 부하들을 앞질렀다. 그때, 앞쪽 수풀 속에서 들새 몇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쪽에 뭔가 있어!' 프란셀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을 만큼 침착했으나, 마음 여린 프란셀은 누군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숲 속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사냥감이 아니라 '귀족 집안 도련님'을 붙잡아서 몸값을 받아내려는 악당들이었다. 순식간에 사내 세 명에게 둘러싸인 프란셀은 도망칠 틈도 없이 몽둥이에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자, 밧줄로 두 손이 묶여 있었고 입에는 지저분한 천으로 재갈이 물려있었다. 그곳은 사냥꾼이나 나무꾼이 사용할 법한 산속 오두막처럼 보였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정신이 드셨나, 도련님…….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으라고……' 참으로 뻔한 협박이었지만, 열한 살짜리 소년 프란셀에게는 아주 잘 먹혀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부하들이 구하러 와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오두막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무언가가 굴러들어왔다. '뭐, 뭐!?' 프란셀을 협박하던 괴한이 뒤를 돌아봤다. 눈앞에선 동료들이 배를 찔린 채 쓰러져 있었고, 그 뒤로 불쑥 나타난 은빛 머리 소년이 보였다. 손에 든 사냥용 단검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너 이놈, 감히!' 잔뜩 화가 난 괴한이 몽둥이를 휘둘렀으나, 은빛 머리 소년…… 오르슈팡은 가볍게 몸을 피했고 그의 단검이 번쩍였다. 짐승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괴한의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몽둥이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포르탕 백작을 따라 사냥에 참가했던 오르슈팡이 친구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알아채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온 것이었다.
'프란셀, 이제 걱정할 것 없어!' 듬직한 친구 덕분에 물고 있던 재갈이 풀린 순간, 프란셀이 다급히 외쳤다. '범인은 둘이 아니야, 한 명 더 있어!' 그러나 한발 늦은 경고였다. 오르슈팡이 뒤돌아봤을 땐, 이미 뒷문에 세 번째 괴한이 서 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료를 보며 분노에 휩싸인 사내가 화살을 겨눴다. '몸값 따윈 필요 없다…… 지금 당장 끝장내주마!' 프란셀에게는 자신을 향한 화살이 몹시도 천천히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위험해!'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뜨자,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젠 정말 걱정할 것 없어' 활을 든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오르슈팡의 왼팔에는 화살이 깊이 박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패를 가져올걸' 놀랍게도 오르슈팡은 프란셀을 감싸며 자신의 왼팔로 화살을 막은 뒤, 반격까지 한 것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지켜준 오르슈팡에게 프란셀은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아유나르트 가 넷째 아들 납치사건은 막을 내렸다. 며칠 후, 목숨을 건진 범인 가운데 한 명은 이러한 말을 남겼다. '검을 든 은빛 머리 기사에게 당했다'고. 그러나 사냥용 단검은 검이 아니었으며, 오르슈팡 또한 기사가 아니었다. 아마 어리숙한 범인이 잘 모르고 한 소리였겠지만, 그 말은 머지않아 사실이 되었다. 프란셀을 구한 오르슈팡은 이 일로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으며, '은빛 검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꿈을 이룬 친구를 축복하며,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러 찾아온 프란셀에게 오르슈팡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좋은 기사는 백성과 친구를 위해 검을 든다…… 단지 그뿐이야' 창천의 이슈가르드, 못다 한 이야기 4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