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죽음이란」

별다른 기척도 없이 어스레한 어둠 속에서 율루스는 눈을 떴다. 테르티움 역에 멈춰 있는 열차 안에는 빈틈없이 빼곡하게 깔린 매트 위에서 군인,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한데 뒤섞여 새우잠을 자고 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일어나 누군가 주워 와 벽에 걸어 놓은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회색 어둠에 녹아든 시계 침이 모호하게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무래도 아직 새벽녘인 것 같다. 동료들의 잠든 숨소리 건너, 차량 뒤편으로 뻗은 어둠 끝에 청린 난로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추워서 깨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일사바드 파견단의 지원을 받기 전에는 꽁꽁 얼어붙은 손발을 녹일 방도도 없었고, 고단함에 지쳐 잠이 들어도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고 잠이 깨곤 했다. 다시 눈을 붙일까 했지만, 이미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이럴 바엔 바깥 공기라도 쐬고 올까 싶어 군화 옆에 나란히 둔 짐꾸러미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면서 신속하게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옆에서 자고 있던 동년배 병사 푸블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뒤척였다. 잠을 깨웠나,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기다려보지만 불평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잠든 숨소리가 들리자 율루스는 안도하며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역 한구석에 놓인 램프. 그 주변에 둘러앉아 여러 명의 병사와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각자 들고 있는 소박한 컵에는 벌꿀을 물로 희석해 향신료를 넣고 끓인 음료가 따뜻한 김을 내며 그리운 냄새를 풍기고 있다. 남은 배급 물자로 만든 그 음료는 역에서 임시로 지내는 모든 사람에게 남김없이 돌아가 한순간이나마 따뜻한 시간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몇 번째 대화가 끊겼을 때였던가, 별말 없이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푸블리우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컵을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나, 샬레이안으로 갈까 해.” 율루스도, 다른 병사들도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 싶어 놀란 것일 뿐, 아마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텔로포로이가 사라지고 종말의 위협도 넘긴 갈레말드였지만, 부흥의 진척은 더뎠다. 정치를 담당하던 황족과 원로원 의원이 한꺼번에 사라진 데다, 주변 국가들도 갈레말 제국에 대한 대응에 신중을 기하며 아직도 대략적인 방침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임시 정권 수립의 필요성이 제창되고 실제로 정권 수립을 위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것을 한 번에 이룰 수 있을 만큼의 기세는 국내외 어디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행정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식민지 지도자들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는지, 동포의 합류는 환영하면서도 제국 자체의 재건을 위해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거기는 혼란을 틈타 다른 국가로 독립할 예정이래” “그쪽도 그렇겠지, 예전부터 제멋대로 굴었으니까” 원한 섞인 소문이 율루스 주변에서도 자주 들리곤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갈레말드에서는 당분간 제대로 된 생활은 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걸 모두 알면서도 귀환하는 자가 있는 한편, 정신 오염 치료를 받으러 타국으로 이송되었다가 완치한 후에도 그곳에 잔류하길 희망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샬레이안을 비롯한 타국도 제국민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곳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려고 마음먹은 자는 푸블리우스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결단을 들은 병사들은 이유를 묻지도, 그렇다고 설득하지도 않고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대답이었다. 푸블리우스도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그저 시선을 컵 속으로 떨어뜨렸다. “……내일 알피노, 알리제와 의논해 봐. 그 녀석들이라면 믿을 만한 곳을 소개해 줄 거야.”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 율루스가 침묵을 깬다. 지금도 부흥에 협력하고 있는 사람 좋은 쌍둥이는 볼일이 있어 내일 아침까지 깨진 유리 전초지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다. 푸블리우스가 표정을 풀며 “그렇게 할게”라고 하자 무거운 긴장감이 겨우 누그러진다. 병사들은 저마다 그의 새 출발을 격려하며 재회를 맹세했다. 그리고 차게 식어버린 컵을 들고 “고향 땅과 동포를 위하여”라는, 늘 외치던 구호와 함께 건배했다.

역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경사 길을 오른다. 사각으로 뚫린 출구가 옅고 아련한 빛을 두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찬 공기가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그의 뜨거운 뺨을 어루만진다. 밖으로 발을 내디디면 그곳에는 그저 현실이 펼쳐져 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연보라색 하늘을 뒤덮은 불길한 그림자는, 하늘을 붙잡을 듯이 우뚝 솟은 거대 건축물 ‘바브일 탑’이다. 과거 마도성이었던 그곳을 향해 골조가 드러난 가옥과 잔해물 더미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시가지의 중앙에 세워진 두 개의 탑――솔 황제가 치세 초기에 만든 ‘신 팔라티움 노붐 궁전’마저도 한쪽 건물만 남긴 채 무참히 무너져 있다. 테르티움 역 주변의 건물은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침 근무를 하러 가는 자, 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 집 앞의 눈을 치우는 하인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자, 누구보다도 빨리 등교하는 성실한 학생…… 모두가 몇 개월 전만 해도 이곳에 있던 사람들인데,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원히. 율루스는 심호흡했다. 싸늘한 공기가 몸 안쪽으로도 파고들어 구석구석까지 잠이 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눈앞에 펼쳐진, 악몽보다 더한 현실에서는 깰 수 없다. 선과 악, 이론과 앞날의 예측이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태연히 그곳에 누워 있다. 그런 불합리함은 이미 오래전에 삼켜버렸는데, 또다시 전우와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오늘 아침은 상처의 딱지가 떨어진 것처럼 허탈함이 스며든다. 순찰이라도 하자고 자신을 타이르며 율루스는 정처 없이 사람이 없는 거리로 나왔다. 어디를 가도 끝없이 회색 폐허가 펼쳐져 있다. 야수들도 이 시간에는 시가지에 없는지, 새벽녘의 거리는 정적에 휩싸여 있다. 문득 시야 끝에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율루스는 그쪽으로 다가가 본다. 도로 옆 잔해 더미에 끼여 너덜너덜해진 신문이 펄럭이고 있다. 어느 집에 있던 것이 날아온 걸지도 모른다. 더 찢어지기 전에 조심히 빼서 펼쳐본다. “아, 이건 그때의……” 익숙한 지면에 무심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수년 전 건국 기념행사에 맞춰 간행된 호외였다. 매년 짧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갈레말드에서는 건국기념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제국의 발전을 축하하고 발전에 공헌한 모든 사람을 표창하는 이날은 거의 모든 제국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처럼 떠들썩하게 즐겼다. 마을 여기저기에 먹거리와 음료수는 물론, 농경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 장식부터 최신형 마도 기술을 탑재한 완구까지 파는, 다양한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쾌활하게 군가를 합창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과거의 고단한 삶이나 전쟁의 기억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이 행사에서 모든 사람이 가장 기대하는 순서는 바로 갈레말 제국군의 행진이었다. 제국 수도를 가로질러 마도성으로 이르는 중앙도로를 수없이 많은 병사와 마도 병기가 보조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간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은, 보고 있는 자 모두에게 흥분과 경외심, 그리고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병사들이 행진하는 길에는 성의 발코니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족들이 있다. 갈레말을 강하고 풍족한 국가로 이끈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광경을 보며 관중은 누구나 역사라는 흐름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순간만큼은 갈레안이라는 피의 유대감이 그 어떤 국가나 종족도 깰 수 없는 가장 강인한 사슬이었으며 세계의 심장은 틀림없는 제국 수도였다. 모두가 고개를 들고 진심으로 “영광 있으리!”를 계속 외쳤다. 율루스가 주운 신문은 그가 아직 학생이었을 무렵――말년에 자주 아팠던 솔 황제가 결과적으로 마지막 행사 참석을 했던 해의 신문이었다. 행사 분위기와 연설의 개요가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모두 찢어져 있었지만, 함께 실려 있는 황제 일가의 초상화는 간신히 남아 있었다. 초상화의 중앙에는 위대한 초대 황제 솔이 엄숙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위엄은 꺾이지 않았지만, 표정이 사납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진다. 율루스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오른쪽 옆에는 솔 황제의 차남 티투스와 그의 아내 아레키나, 두 사람의 아들인 네르바가 있다. 부자는 모두 신경질적인 용모였는데, 그 모습은 책에서 본 젊은 시절의 솔 황제와 비슷했다. 한편 왼쪽 옆에는 솔 황제의 손자, 죽은 장남 루키우스가 남긴 아들인 바리스가 서 있다. 아버지의 체격을 물려받아 갈레안 중에서도 보기 드문 거구인 데다 공적과 품격 모두 대장군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칭송이 당시에도 자자했다. 이해심 깊은 아내 카로사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옆에는 어머니인 휘파티아가 있다. 그녀는 이듬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남편 곁으로 가게 되는데, 죽기 직전까지 티투스와 후계자 경쟁을 계속하던 바리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맨 끝에서 지루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제노스 예 갈부스. 그 모습을 보니 설원에서 마주쳤을 때만큼의 증오는 생기지 않아도, 추억에 잠겨 있던 마음이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율루스는 지금 지저분한 신문 조각을 들고 폐허 속에 서 있다. 그날의 열광이 이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가령 모든 잔해를 치우고 다시 건국 기념행사를 개최한다고 해도 완전히 똑같은 흥분은 되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마지못해 다음 시대로 오게 된 우리들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율루스는 잠시 생각한 뒤, 신문의 먼지를 털어내고 조심스럽게 접어 품속에 넣은 뒤 자리를 떴다. 그리고 또다시 고요한 거리를 걸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모래와 자갈 가득한 바닥을 걷는 군화 소리만 울려 퍼진다. 도중에 순찰 업무도 겸해서 형태가 남아 있는 집들의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용할 수 있는 물자는 이미 누가 다 가져가버리고 쓸데없는 생필품만 나뒹굴고 있었다. 여러 번 파괴된 탓에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에서 먼지와 재가 쌓여 주워 가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한 폐가에 다다랐다. 지붕이 뚫리고 벽도 크게 무너져 있어 건물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인 곳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자세히 조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입구를 반쯤 막고 있는 잔해를 조심스럽게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깜짝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곳에는 제국군 병사가 쓰러져 있었다. 수많은 죽음을 보아 왔기에 숨이 끊어져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았다. 율루스는 천천히 시체로 다가가 옆에 무릎을 꿇고 상태를 확인했다. 혹독한 추위 때문인지 부패는 많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꽤 오래전에 죽은 자인 것 같다. 내전 중에 전사한 자라면 시체를 거두어 갔을 테니, 신도가 된 자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싸우던 자일 것이다. 율루스는 창으로 베인 상처 외에도 심하게 긁힌 자국과 물린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후자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신도로 변해 버린 그의 가족도 그런 식으로 그를 공격했었다. 조심히 투구를 벗겨 본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제I군단이 아닌 군단에 소속된 하급 병사인 듯하다. 그 또한 기구한 운명으로 정신 오염을 피했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다 마침내 여기서 힘이 다했을 것이다. 벗긴 투구를 그의 옆에 두고, 묵념을 올린다. 에오르제아 사람들처럼 신에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죽은 자가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그리고 선조들과 함께 동포의 앞날을 지켜봐 주기를 빌었다. 단지 오늘은 그조차도 공연히 허무했다. 알피노와 알리제 말에 따르면, 새벽의 혈맹은 영혼이 이르는 별바다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거기서는 영혼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기억을 씻어내고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생과 사의 진실이라면 신봉하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도, 율루스와 동포들이 간직하고 있는 소원도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이룩한 일이――그 건국 기념행사처럼――결국에는 의미를 잃고, 죽음 또한 재탄생을 이루기 위한 시스템일 뿐이라면 굳이 살고 죽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또다시 마음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것 같아 율루스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다고 시체 옆에서 할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공교롭게도 아무런 도구도 없었기에 다음에 다시 와서 묻어 주기로 하고,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확인하려고 그의 몸을 살펴보았다. 난투 중에 잃어버린 것인지, 규정 인식표는 소지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장비도 범용 지급품이라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주먹에 뭔가 꽉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인증 열쇠 케이스로군.” 마도 아머를 조종할 때 사용하는 인증 열쇠. 그는 그 케이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정작 열쇠가 없는 걸 보니 본체에 꽂은 채 도망쳐 나왔거나,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가져갔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맡겼나……?” 동포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지원부대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을까. 목적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빈 케이스를 세게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간절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다른 어떤 예상보다도 납득이 되었다. 문득…… 갑자기 눈을 떴을 때처럼,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 신문이 나왔던 초여름, 학교 친구가 감명 깊게 읽었다며 시집을 추천해준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한 번 읽기는 했지만,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던 율루스는 뭐가 재미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단, 모두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인상 깊은 시구가 있었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선물하는 사랑이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내가 살아서 했을 경험을, 당신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고 시는 말했다. 마도 아머의 인증 열쇠를 맡긴 그도 그랬을까? 내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 스스로 목숨을 끊은 퀸투스, 구하지 못한 전우들,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사라져버린 모든 동포가 죽음과 함께 사랑을 남겼다는 것인가. 죽은 자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상처에서 흘러넘치던 공허함은 멎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살고 죽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테지. ……나도 죽는 날까지 살아볼까.” 말을 걸어도 시체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 정적 속, 뚫린 천장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에 이끌려 올려다보니 하늘이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다. 이제 역에서 자고 있던 동료들도 일어날 때가 됐겠지. 율루스는 다시 한번 짧게 묵념한 뒤 일어섰다. 폐가를 뒤로하고 아침으로 물든 거리를 걸어 나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